한 장의 얇고 검은 둥근 원판 위에 얹은 가느다란 바늘은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홈을 따라 가며 그 안에 숨겨진 주파수를 읽어 멋진 음율로 읊어 냈다. 참 신기했던 이 얇고 검은 둥근 원판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LP(Long Play Record)다. 흔히 레코드 판이라고 부르던, 지금 디지털 음원을 듣고 있는 세대에게는 낯선 음악 매체지만, 오래 전 음악을 들어왔던 세대에게 추억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LP를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턴테이블(Turntable)이다. CD 음악을 듣기 위한 CD 플레이어가 필요하듯이 LP를 돌리기 위한 넓고 둥근 테이블이 돌아가는 듯한 장치다. 턴테이블은 LP의 수요가 떨어지던 시대에 점점 사라지다 다시 부활하는 모양새다. 이 말은 LP의 판매량 증가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수요를 내고 있는 핵심은 음악 애호가들이다. 그들은 디지털로 충족되지 않는 감성을 LP에서 찾고 있다.
이런 음악 애호가들의 수요에 의해 LP 수요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는 하다. 미국에서 지난 해 팔린 LP 수요는 1천200만 장. 영국도 수요가 늘고 있다. 다만 한국 사정은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는 2005년 마지막 LP 생산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 이후 LP 음반은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가왕 ‘조용필’의 새 앨범이 LP로 나오면서 지드래곤, 아이유, 원더걸스 등이 희소성을 중시한 한정판 LP 음반을 내놓았을 뿐, 활성화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그나마 서울에 있는 20여곳의 LP 판매상과 2011년부터 열리는 서울 레코드 페어가 이러한 음악 애호가들의 취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다.
어쨌거나 이처럼 증가하는 LP 수요 증가에 오디오 기기 업체들이 가만 있을리 없다. 새로운 턴테이블도 늘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니처럼 특이한 기능을 가진 제품을 내놓는 업체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소니가 11일에 국내에서 설명회를 진행한 PS-HX500은 듣는 것뿐만 아니라 LP를 디지털 음원으로 추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니는 이 제품은 올초 CES에서 공개했고 이제야 판매를 시작했다.
그런데 HX500은 두 가지 관점으로 평가를 나눠야 한다. 턴테이블로서 평가와 LP를 음원으로 추출하기 위한 사용성에 대한 평가다. 일단 턴테이블로써 갖춰야 할 기본기에 대해 섬세하게 다룬 인상이다. LP를 조용하게 흔들림 없이 회전시킬 수 있는 안정감 높은 기구 특성과 바늘이 읽어들인 신호를 이용자에게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는 회로 설계에 대한 평가는 꽤 좋을 듯하다. 물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취 환경에 따라 또 평가는 또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LP 플레이어의 기본기에 대한 불만은 크지 않을 듯하다.
다만 HX500의 음원 추출은 보기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일단 LP를 원음 형식 음원(DSD나 PCM)으로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LP로 소장하고 있는 음악을 LP 플레이어가 없는 다른 환경 듣고 싶을 때 이를 이용하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원으로 변환할 때 LP를 재생하면서 생기는 먼지 잡음까지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그 잡음도 LP를 들을 때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이유라는 게 소니 코리아의 설명이다.
이렇게 LP를 듣는 음악적 감성까지 담아낸 음원을 저장할 수 있지만, 음원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불편한 요소들은 돌아봐야 한다. LP를 음원으로 변환하려면 PC가 필요하다. HX500을 USB 케이블로 PC에 연결한 뒤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녹음을 해야 하는 데다, 소프트웨어 자체도 전체 화면을 지원하지 않는데다 편집 도구도 그리 편안하게 다룰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녹음 이후 트랙 구분과 앨범 이미지 작업을 모두 이용자가 직접 편집해야 하는데, 후반 작업이 만만치 않은 느낌이다. 일단 모든 녹음은 LP를 일반적인 속도로 해야 하는 만큼 기다려야 하고, 최소한 한쪽 면에 4개 이상의 트랙을 자르고 이름을 넣는 작업을 이용자가 일일이 넣어야 하는 까닭에 원음으로 변환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그 시간과 노력만큼의 인내를 요구한다.
소니 HX500으로 녹음을 한 이후 트랙을 알아서 걸러주거나 무음에 대한 구간을 파악하고 자를 지점을 예측하거나 녹음한 LP와 관련된 DB에서 곡 정보를 끌어와 해당 트랙 정보를 자동으로 넣어준다면 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것 중 어느 것 하나도 지금 출시하는 HX500에서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음원은 DSF 또는 WAV, 딱 두 가지 형식으로만 저장할 수 있다. 그런데 DSF로 저장하면 이를 재생할 수 있는 장치는 제한된다. 비록 이 장치가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해도, 사실 음원으로 구하기 힘든 LP 음악을 스마트폰이나 MP3 플레이어에 담아 들으려는 이용자에게 HX500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소니는 HX500을 만든 이유가 LP를 추억하는 하이파이 이용자를 위한 것이라면서도, 사실 HX500의 기능을 보면 그 이용자까지 모두 아우르는 인상은 아니다. 물론 턴테이블이라는 기구보다 녹음을 한 음원의 처리 환경의 문제가 더 크다. 이 부분을 손대지 않는 이상 음악 애호가들의 턴테이블 관점으로 평가받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이 첫인상이 다음 만남에서 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럴 일이 있을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