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IT 분야의 셀 수 없는 전문 커뮤니티 행사가 열린다. 모든 이들에게 문을 여는 전시회와 달리 해당 분야의 전문가 또는 사용자, 기업이 모여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조금 특별한 자리다. 그런데 커뮤니티 컨퍼런스 목록에 무려 19년 째 이름을 올린 행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듯하다. 더구나 대중적으로 가깝지 않은 ‘캐드'(CAD, Computer-aided Design) 분야의 커뮤니티 행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19년의 역사를 쓴 커뮤니티 컨퍼런스는 바로 솔리드웍스 월드(SolidWorks World)다. 솔리드웍스 월드 2017은 지난 2월 8일부터 10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센터에서 사흘간 진행됐다. 이 행사를 지켜 보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날아온 참관객만 5천 명에 이른다. 그런데 참석자들의 이력이 흥미롭다. 행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캐드를 주업으로 삼은 엔지니어나 산업 디자인 전문가만 있던 게 아니라서다. 학생, 마술사, 선생님, 정비공 등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들을 위해 솔리드웍스 월드는 자리를 마련했다. 솔리드웍스는 사흘 동안 커뮤니티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때론 담백하게, 때론 과격하게, 때론 멋스럽게 펼쳐냈다. 솔리드웍스 이용자들이 기다리는 새로운 소식도 적지 않게 쏟아냈다.
솔리드웍스 월드 2017의 주제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Create the New. The Next, The Never Before)다. 솔리드웍스와 모 회사 다쏘시스템즈 중역들은 틈틈이 키노트와 컨퍼런스에서 새로운 기술과 전략을 소개했다. 솔리드웍스는 컴퓨터에서 실행하는 설계 소프트웨어지만, 이제 단순히 도안을 그리는 게 아니라 설계된 제품을 실제 생산했을 때를 가정해 그 작동 상황을 미리 확인하는 시뮬레이션과 설계 데이터의 보안과 배포 관리, 설계된 대로 컴퓨터가 제조하는 캠(Computer-aided Manufacturing) 영역까지 발을 넓혔다. 아마도 이 소식은 설계와 생산의 비용효율을 고려하는 수많은 관계자에게 매우 중요한 소식일 것이다. 심지어 솔리드웍스 기반 3D 경험 플랫폼은 제품이나 건물 한 채 뿐만 아니라 싱가폴 같은 도시 국가 전체의 지상과 지하에 있는 건물과 시설의 3D 모델링으로 도시 인프라의 진화를 확인하거나 건물, 기후 변화에 따라 환경 변화를 예측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솔리드웍스 월드 2017의 메시지는 업계를 향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관통하는 메시지도 있다. 특히 업계라는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어서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쉽게 캐드를 통해 3D 세계에 접근하는 것, ‘3D 설계의 민주화’다. 모두 보편적으로 쓰는 3D 설계에 대한 디자인 업계의 화두에 솔리드웍스도 본격적으로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사실 캐드는 낯설지 않으면서 낯선 분야다. 컴퓨터 설계라는 단순한 정의로 보면 낯설지 않다. 단지 우리의 이용 빈도로 보면 매우 낯설 뿐. 대부분 캐드로 만든 제품을 쓰지만, 누구나 캐드를 하지는 않는다. 길거리를 신나게 달리는 자동차, 하늘을 나는 항공기는 물론이고, 집이나 식당에서 보는 흔한 숟가락 조차 캐드로 설계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쓰기 위해 캐드를 다룰 필요는 없다. 직선을 연결하거나 구부리고, 원을 붙여 넣기 위해 화면 속 작은 도구들을 다루는 복잡한 캐드 과정을 생략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의 언어가 확장될 때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딱히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외국 여행을 갈 수 있으나 그 언어를 조금 알면 더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 캐드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 더 즐겁고 유용한 사례를 알려주는 것이 솔리드웍스 같은 캐드 업계의 과제이고, 솔리드웍스는 그 이야기를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솔리드웍스 월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행사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일루전 프로젝트는 디자인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곳 중 하나다. 왜냐면 일루전 프로젝트의 구성원은 모두 마술사라서다. 9명의 마술사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연도 하고 또는 다른 마술사와 협업도 하는데, 진짜 마술사임을 증명하듯 솔리드웍스 월드 2017의 개막을 축하하는 마술쇼를 꾸미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본업은 마술사지만 또한 솔리드웍스 이용자다. 지켜보는 수많은 눈을 속이고 감탄을 자아낼 마술을 위한 장치를 고안하기 위해 도구를 배웠고, 수많은 마술 장비를 만들었다. 마술을 위한 설계 노하우를 얻은 이후 이들은 데이비드 카퍼필드나 이은결도 이들과 함께 마술을 기획하면서 영역을 더 넓혔다.
전자 기타를 만드는 PRS 기타도 캐드에 대한 선입견을 없앤 곳이다. 이들은 한동안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자 기타를 만들어 공급했지만, 이제는 컴퓨터 안에서 솔리드웍스로 설계하고 그 설계된 모델 안에서 연주도 해본다. 때문에 PRS 기타의 매니징 디렉터 폴 리드 스미스는 캐드를 이용했을 때 종전에 걸리던 시간의 절반만 쓰고도 원하는 기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점을 매력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기타리스트가 급진적으로 그려낸 기타 스케치도 노트북에서 그 자리에서 3D로 설계한 뒤 이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으며 기타리스트가 원하는 제품으로 완성하는데, 실제로 이 행사에서 그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DPEA(Dos Peublos Engineering Academy)라는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학교는 수업 과정에 캐드를 넣었다. 물론 캐드만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들의 목표는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열정을 느끼는 흥미롭고 풍성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으로 이를 스팀(S.T.E.A.M)이라 부르는 일상적인 교과 과정으로 구현하는 중이다.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기계 공학(Engineering), 예술(Arts), 수학(Math)을 따로 나누어 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 어떻게 연계되는지 충분한 환경에서 실습하고 실질적 기술을 개발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를 위해 80명의 지역 자원 봉사자들이 400여 학생의 실습을 돕고 있다. 특히 이 중 절반인 200명이 여학생이라는 점은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다쏘시스템은 이 학교를 위해 솔리드웍스 PDM 프로페셔널을 무상 대여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사례 외에도 이곳에서 발표된 대부분의 사례는 산업적인 현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찾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맞춤형 완구를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이스라엘 타이니 러브(Tiny Love)는 솔리드웍스 클라우드에 있는 3D 데이터를 활용해 초기 스케치에 맞게 변형한 후 1시간 만에 출력하고 있고, 프로틴시스라는 움직이는 로봇을 만든 조나단 퓨리온도 솔리드웍스로 모든 부품을 설계한 뒤 실제 움직이는 로봇을 완성했다. 옥타곤 안에서 싸우는 로봇 리그의 원격 로봇들을 만드는 사람도 대부분 전문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이나 학생이지만, 로봇을 설계하는 데 캐드를 활용하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엔지니어링의 열정을 가진 이들은 유투브 동영상을 교과서로, 커뮤니티의 도움을 선생님으로 인정하면서 솔리드웍스를 깨우친다.
이처럼 꼭 전문 교육을 받은 산업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솔리드웍스로 설계하는 일반인은 적지 않다. 전문 디자이너와 일반 이용자를 모두 합해 보니 그 수만 22만 2천 명에 이른다. 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은 각 지역이나 관심사에 따라 솔리드웍스 관련 커뮤니티를 이룬다. 미국 전역 만 따져도 그 수가 상당히 많다. 솔리드웍스 월드에서 마련한 행사 일부는 이들을 위해 준비됐다. 커뮤니티의 활동을 소개하고 열성적인 커뮤니티에 보상하며 그들의 활동에 경의를 표한다. 커뮤니티가 3D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보편적 접근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는 점을 솔리드웍스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리드웍스는 이용자 숫자를 강조하지 않는다. 어렵게만 여겨지는 3D 설계의 복잡성을 덜고, 캐드 학습의 접근성을 높이는 관점을 해소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커뮤니티가 그 같은 일에 도움을 주기는 해도, 다른 방향에서 솔리드웍스는 단순히 캐드 학습의 중요성만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은 엔지니어링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앞서 DPEA가 좋은 예지만, 성인이 아니라 엔지니어링의 아름다움을 더 어린 연령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솔리드웍스 측의 생각이다.
때문에 솔리드웍스는 더 어린 연령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것이 솔리드웍스 앱스포키즈(http://www.swappsforkids.com/ )다. 솔리드웍스는 성별과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교육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서비스를 이미 시작했다고 말한다. 솔리드웍스 앱스 포 키즈는 캐드 소프트웨어의 복잡한 도구를 쓸 필요 없이 모바일 앱이나 웹앱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3D 모델을 만들고 공유할 수 있다. 또한 규칙에 따라 성패를 결정하는 게임용 캐릭터로도 3D 모델을 쓸 수 있는데, 서비스에 등록된 4천 여명 가운데 활동 중인 1천300명이 5천 개의 3D 모델을 만들어냈다. 클라우드와 연동되어 PC 없이 인쇄하는 기능을 탑재한 신도 3D 프린터는 인터넷에 공유되는 솔리드웍스 키즈 포 앱스의 3D 모델을 실물로 출력하면서 엔지니어링의 재미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어 이번 솔리드웍스 월드 2017에서 처음 소개됐다.
솔리드웍스는 14세 미만의 어린 이용자들을 위해서 만든 솔리드웍스 앱스 포 키즈 같은 시도가 장차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다쏘시스템즈 솔리드웍스 코퍼레이션의 CEO 지안 파올로 바시는 인터뷰를 통해 “앱스 포 키즈는 3D 설계의 진입 장벽을 낮추어 3D나 엔지니어링 인구를 확장하려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비록 이 말이 업계 관계자의 당연한 욕심으로 비칠지 몰라도, 이 같은 방법을 통해 3D와 엔지니어링을 특수한 목적에서 필요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지 않고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물론 어릴 적부터 3D 모델을 이해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는 있지만, 솔리드웍스처럼 정교한 3D 모델링을 하는 것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그래도 어려운 과정만 강조할 때 부딪치는 한계를 잘 아는 솔리드웍스는 좀더 즐기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 모험을 떠난 것이다. 물론 쉬운 3D를 경험한 이들이 성장한 이후 이들에게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캐드에 대한 대비가 솔리드웍스 로드맵에 들어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기존 세대가 알고 있던 복잡한 3D, 캐드, 엔지니어링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려는 이 같은 노력이 가까운 미래 세대에게 3D는 전혀 다른 언어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누구나 3D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면 3D는 그 자체로 이미 새로운 언어 또는 도구로 이해될 것이기에… 이것이 3일 동안 수많은 기술을 이야기하고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 솔리드웍스 월드 2017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다.
동시에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