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크패드(ThinkPad)의 시작은 태블릿이었지만, 씽크패드의 아이콘이 된 것은 700C 노트북이었다. IBM의 80486 호환 프로세서와 256 색상을 표시하는 10.4인치 LCD를 탑재한 700C는 300 및 700과 함께 그해 10월에 데뷔했음에도 홀로 130만대의 판매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물가가 낮았던 시기에 대당 4천350달러 짜리가 무려 130만 대나 팔렸으니 PC 업계에 씽크패드라는 이름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름을 아로새긴 700C의 공헌을 잊지 못하는 이들은 IBM에서 레노버로 브랜드를 이전한 지금도 씽크패드의 탄생지인 야마토 연구소(Yamato Lab)에 남아 그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야마토 연구소를 떠난 이들 중에도 각별한 애정을 쌓게 해준 씽크패드 700C에 공헌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씽크패드 브랜드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게 한 씽크패드 700C에 대한 의미는 남다른 셈이다.
(참고로 야마토 연구소는 가나가와현 야마토 시에 있었으나 2012년 요코하마 미라이 타워로 이전했다.)
아마도 남다른 의미를 남긴 씽크패드의 오마주라고 해야 할까? IBM에서 레노버까지 이어진 야마토 연구소 출신의 씽크패드 주역들은 씽크패드 25주년이 되는 올해를 위해 그 유산을 기념하는 아주 재미있는 일을 준비했다. 25살 된 씽크패드를 위한 특별한 생일 선물. IBM과 레노버가 씽크패드의 25살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의 레트로 씽크패드, ‘씽크패드 25′(ThinkPad 25)를 선물한 것이다. 그 행사를 25년전 700C를 출시한 날과 같은 10월 5일 밤, 야마토 랩이 있는 요코하마에서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레노버는 ‘씽크패드 25’를 내놓는데 조심스러웠다. 레노버는 2년 전 테크월드가 끝난 직후 공식 블로그를 통해 ‘레트로 씽크패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지금은 레노버에서 퇴직했으나 이 프로젝트를 계속 주도해 온 데이비드 힐 전 레노버 수석 부사장 겸 디자인 이사가 블로그에서 레트로 씽크패드에 들어갈 부품에 대해 여러 설문을 올린 것이다. 그는 이 제품이 ‘씽크패드 25’라는 사실을 숨긴 채 레트로 씽크패드에 넣을 과거 씽크패드의 유산, 또는 지금 시대에 필요한 부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키보드 조명, 화면 크기, 주변 장치는 물론 심지어 트랙포인트 캡의 형태까지 씽크패드 팬들의 의견을 구하고, 설문 결과를 토대로 최종 제원을 결정했다. 그렇게 과거 씽크패드의 느낌을 담았으면서도 최신의 기술로 재탄생한 것이 씽크패드 25다.
야마토 연구소의 전현직 출신들이 요코하마에 모여서 함께 발표한 씽크패드 25는 이것이 ‘레트로’라는 의미를 살리는 데 주력한 듯한 인상이다. 사실 최신 씽크패드에서 추구하는 더 얇고 가벼운 노트북보다 과거의 씽크패드과 오늘의 기술을 적절하게 조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최신 노트북에서 바라는 두께와 무게는 씽크패드 25에선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 좋게 말하면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기술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것이랄까?
25라는 숫자로 씽크패드 25를 상기시키는 제품 상자를 열고 꺼낸 본체는 검은 화면 덮개의 싱크패드처럼 보였지만, 덮개를 닫았을 때 오른쪽 하단 모서리, 열었을 때 왼쪽 상단 모서리에 비스듬하게 들어간 씽크패드의 로고는 과거와 현재가 만난 것임을 의미하는 색깔을 썼다. ‘Think’는 지금 씽크패드에서 쓰고 있는 은색을, ‘Pad’는 알록달록했던 레트로 로고를 섞었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로 만들었으면서도, 씽크패드의 유산으로 빚어진 제품임을 상징적으로 이 씽크패드 로고가 보여준 셈이다. 이 로고는 덮개를 열었을 때 왼쪽 손받침 부분에도 똑같이 들어 있다.
덮개를 열었을 때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빨콩이’라 부르는 트랙포인트의 모양이었다. 그동안 씽크패드의 빨콩이는 모양이나 재질이 몇 번 바뀌면서 이전의 느낌을 잃어 버리게 한 것 중 하나다. 특히 딱딱한 섬유 재질처럼 까칠했던 트랙포인트가 고무 재질로 바뀌었을 때 많은 ‘이게 정말 최선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던 것으로 씽크패드 25는 과거의 트랙포인트의 까칠한 재질의 둥근 머리 모양을 담았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7열 키보드다. 보기에 따라선 8열이 될 수도 있는 매우 복잡한 키보드가 돌아온 것이다. 오늘날 씽크패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노트북은 6열 키보드를 쓰고 있는데, 쓰는 빈도가 적은 키를 줄이는 대신 다른 키와 조합해서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가끔 쓰는 버튼이라도 쓰려고 보면 한참을 찾아 헤매는 불편함을 참은 채 써 왔던 이들에게 과거 키보드의 귀환은 반가울 수밖에. 온전한 기능키와 분리된 키들, 그리고 푸른 색의 엔터키가 빽빽하게 키보드를 채운 것을 보니 이제야 과거의 제품 같은 실감이 난다.
빨콩이와 7열 키보드의 귀환과 반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다. 화면 상단에 있는 조명으로 키보드를 비추는 씽크라이트는 없다. 대신 선택한 것이 백라이트 키보드다. 씽크라이트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아쉬운 일이지만, 레트로 싱크패드 설문에서도 사실 씽크라이트가 근소하게 앞섰을 정도로 의견이 팽팽했던 부분이다. 물론 지금 기술로 씽크라이트를 적용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사실 씽크라이트가 화면의 몰입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제외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날 공개한 씽크패드 25에서 애석한 한 가지는 모두 완성된 형태였으나 켤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충전을 해 놓지 않았던 건지, 전원 버튼의 작동을 막았던 건지 알 수는 없다. 이날 현장에 여러 대의 씽크패드 25가 있었지만, 실제 작동할 때의 느낌을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소음 없이 부드럽게 눌리는 키보드와 빨콩이로 커서를 움직여 보는 느낌까지 이 글에 담기는 어렵게 됐다.
씽크패드 25의 제원은 인텔 7세대 코어 i7-7500U와 16GB DDR4 램, 512GB PCIe SSD, 엔비디아 지포스 940MX(2GB GDDR5 램), 돌비 프리미엄 오디오 등이다. 화면 크기는 14인치인데, 이는 설문 결과에서 요구한 그대로 반영됐다. 다만 해상도가 1,920×1,080이라는 게 조금 아쉽다. 그나마 터치 스크린을 적용해 좀더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여지는 높였다. 또한 윈도 헬로에서 이용할 수 있는 얼굴 인식 적외선 카메라를 화면 상단에 넣었고 키보드 오른쪽 테두리에 지문 센서를 내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단자 관련 설문은 거의 그대로 반영된 점이다. USB 3.0 3개, 썬더볼트 겸용 USB 타입 C 1개, HDMI 1개, 유선 랜 1개, 4개 카드를 지원하는 카드리더, 그리고 도킹 포트까지 모두 본체에 넣었다. 적어도 씽크패드 25에서 동글을 사는 데 드는 비용 만큼은 더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신 이 두꺼운 단자들을 모두 담은 만큼 두께는 각오해야 한다. 레트로 씽크패드 설문에서 저조한 응답을 보인 광학 드라이브는 역시 제외됐다. 배터리는 48Wh로 최대 13.9시간 동안 작동한다는 게 레노버 측의 설명이다.
여기까지가 10월 5일 밤 요코하마에서 본 씽크패드 25에 대한 전부다. 실제 작동하는 것까지 접했다면 좀더 긴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만 씽크패드 25는 과거의 유산과 최신 기술의 조화를 바라는 씽크패드 팬들의 염원으로 나온 제품이다. 물론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씽크패드를 다르다고 말했던 그 시대의 팬들과 공유할 수 있는 제품이기를 바라며 씽크패드의 유산을 담으려 애쓴 모든 개발자들의 염원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