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CEO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컴퓨팅 업계를 뒤흔든 CPU 취약성 문제에 대한 사과로 CES 2018 기조 연설의 시작을 무거운 분위기에서 열어야 했지만, 사실 그 지점만 지나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단어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평창이다. 사실 인텔의 의도라 보기는 어려워도 어쨌든 CES 2018 기조 연설에서 평창을 소개한 것은 인텔의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스포츠 이벤트라서다.
그런데 컴퓨팅 기업인 인텔이 어째서 평창을 주목하는지 의문을 가질 만하다. 사실 인텔은 스포츠와 관련된 다양한 비주얼 컴퓨팅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물론 인텔의 컴퓨팅 파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정말 흥미로운 비주얼 기술들이 많다. 이러한 인텔의 기술들은 지금까지 몇몇 스포츠 이벤트에서 시범적으로 활용되기는 했다. 하지만 대규모 이벤트에서 이 기술을 모두 투입한 사례가 없다보니 실제 쓰임새에 대한 의문이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지난 해 7월 인텔이 올림픽 평의회(IOC)의 월드와이드 탑 파트너십을 맺은 것은 이러한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인텔이 스포츠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비주얼 컴퓨팅 기술을 한꺼번에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스포츠 이벤트라면 올림픽 만한 것이 없는 것이 없어서다. 그리고 IOC와 손을 잡은 이후 그들의 기술력을 처음 선보이게 된 기회가 바로 이번 2018 평창 올림픽이었다.
이번 평창 2018에 인텔이 들고 온 기술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개회식날 평창 상공에서 움직이는 대형 스노 보드 선수의 모습과 오륜기는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1천218개의 진짜 드론을 조종할 수 있는 인텔의 기술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인텔이 기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림픽 기간 내내 인텔은 그들의 컴퓨팅 기술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장치도 해놓았다.
특히 가상 현실(VR) 생중계는 이번 평창 2018에서 심혈을 기울인 인텔의 기술 중 하나다. 인텔은 CES 2018보다 앞서 지난 해 CES 2017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가상 현실 생중계 시범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가상 현실 생중계에 필요한 카메라를 경기장 여러 곳에 배치한 뒤 VR 헤드셋을 쓴 시청자가 앱을 통해 다른 카메라로 이동하며 실시간 중계를 볼 수 있는 대화형 실시간 가상 현실 비디오를 실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시간으로 카메라의 위치를 바꿔가며 중계를 볼 수 있는 인텔의 가상 현실 기술이 트루 VR 테크놀로지(True VR Technology)이다. 트루 VR은 2016년 11월 인수한 VR 스타트업 보크(Voke)의 자산이었다. 보크는 인텔에 인수되기 전 몰입형 스포츠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VR 관련 기술을 2004년 설립 이후 10년 넘게 개발해온 곳이다. 보크에서 개발한 트루VR 기술의 방향은 크게 3가지. 실제와 같은 몰입형 경험을 구현하기 위한 스테레오스코픽 캡처 시스템과 다양한 플랫폼에서 이 경험을 살리는 멀티 플랫폼, 그리고 방송에 친화적인 솔루션의 구축이었다. VR 생중계에 필요한 영상 캡처 및 각 카메라 지점의 시간을 동기화하는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인텔 캐피털의 투자를 이끌어냈고, 인텔은 보크를 인수한 이후 인텔의 컴퓨팅 기술을 접목해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중이다.
보크가 인텔에 인수되기 전 개발했던 트루 VR의 캡처 시스템은 일반적인 VR 카메라가 아니다. 트루 VR을 위해 보크가 만든 VR 카메라 ‘포드'(Pod)는 입체감과 깊이를 측정할 수 있도록 2개씩 쌍을 이룬 12개의 4K 카메라를 하나의 몸통에 넣어 180도를 촬영한다. 포드에 탑재된 카메라는 어안 렌즈를 쓰지 않으므로 어안렌즈로 촬영하는 것보다 왜곡이 거의 없는 영상을 촬영하지만, 포드의 모든 카메라로 수신된 시간당 1TB에 이르는 48K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이고 압축해 전송하려면 고성능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다. 더구나 포드가 늘어날 수록 이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컴퓨팅 파워도 더 요구되기 때문에 더 강력한 컴퓨팅 환경을 구축할 수 있고 이번 평창 올림픽을 위해 건립된 전용 데이터 센터에 3만 5천대의 제온 서버를 넣은 인텔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도다.
때문에 인텔은 트루 VR 기술을 위한 컴퓨팅 파워를 선보일 수 있도록 개선된 포드를 이번 평창에 가져왔다. 각 포드는 평창 올림픽 스태디움을 비롯해 경기장에 배치됐는데, 인텔은 평창에 설치한 VR 포드의 정확한 숫자를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각 경기 중계에 3~5개의 포드를 쓴다는 인텔의 발표로 대략적인 숫자는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개막식 및 스키 활강은 인텔이 말한 3~5대보다 많은 6대의 VR 포드가 쓰였는데, 평균 4.5대의 VR 포드가 14개 경기장의 VR 중계 및 녹화에 투입된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60대 이상의 VR 포드가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2월 9일 저녁에 진행된 평창 2018 개막식도 6대의 VR 포드와 트루 VR 기술을 통해 생중계를 마친 상황으로 인텔은 올림픽 방송 서비스 (OBS)와 함께 라이브 및 주문형 비디오 콘텐츠를 모두 이용할 수있는 30개의 올림픽 행사를 실시간 중계 및 녹화한다.
실제로 VR 생중계로 본 평창 개막식은 TV로 중계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몰입감도 훌륭했다. 물론 가상 현실 헤드셋 상의 화질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나, 실시간 전송되는 영상 품질은 낮은 해상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뭉개진 느낌 없이 깔끔해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특히 현장에서는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볼 수 없는 것과 달리 일반인이 갈 수 없는 무대 앞에 카메라를 배치해 놓은 데다 시청자가 영상 내 메뉴를 통해 위치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가깝게 현장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물론 개막식 실시간 중계에서 영상 수신에 시간이 걸려 흐름을 끊는 일이 자주 발생한 점은 옥의 티다. 하지만 개막식 다시 보기에서 같은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고 스키 활강의 생중계 역시 지연을 반복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개막식 당시만 다소 불안정했던 문제로 보인다.
트루 VR 기술로 생중계된 평창 2018 개막식을 비롯해 포드 설치를 끝낸 곳에서 진행되는 경기는 지금 구글 데이드림 및 기어 VR 등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VR이나 윈도 MR 장치를 갖고 있는 이들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평창 2018에선 모두 무료다. 구글 플레이 스토어와 오큘러스 모바일 스토어에서 ‘평창VR’을 검색해 앱을 설치한 뒤 스마트폰을 VR 헤드셋에 꽂아 즐기면 된다. 윈도 MR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HTC 바이브와 오큘러스 리프트는 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 참고로 VR 헤드셋에서 평창 VR 앱을 실행하면 몇 개의 단순한 메뉴를 통해 이미 끝난 VR 중계를 다시 볼 수 있고, 앞으로 볼 수 있는 경기 중계 일정도 미리 알 수 있는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인텔 트루 VR 기술을 활용한 가상 현실 중계는 아직 완벽하다 말하긴 이를지 몰라도 앞서 시도된 다른 가상 현실 생중계와 차원이 다른 완성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큰 의미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평창에 갈 수 없거나, TV 중계 만으로 만족할 수 없거나, 모든 경기를 현장에서 볼 수 없는 이들이 갖게 될 안타까움을 IT 기술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보여준 의미일 것이다. 트루 VR은 스포츠 중계의 변화를 이끌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공간을 잇는 가상 현실의 장점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 가장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눈앞에 평창을 보여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