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애플 생태계(덫)에 빠져있는 이들은 아무리 좋다고 하는 안드로이드폰을 써도 결국 아이폰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이폰을 쓰기 전에 맥을 썼고 아이팟을 사용하면서 구입한 음악과 다양한 컨텐츠, 여기에 애플 기기와 서비스만을 사용했을 때의 경험은 쌓이고 쌓여 갑자기 다른 제조사의 기기가 엄청나게 좋다고 해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런 나에게 픽셀 XL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첫 번째 구글폰이라는 타이틀만큼 구글이 신경써서 만든 스마트폰일뿐 아니라, 구글만의 하드웨어와 서비스가 제대로 만나는 시발점이다. 하지만 나처럼 독한 애플 이용자를 흔든 픽셀 XL은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구성품 & 첫 인상
박스는 심플하다. 포장재 자체도 단순하고 고급스러운 느낌도 없다. 박스 안쪽도 마찬가지. 상자를 열면 픽셀이 먼저 보인다. 오른쪽엔 18W(9Vx2A) USB-C 충전기와 USB-C 케이블이 있고, 픽셀 XL 밑에는 사용 설명서와 USB-C to USB-A 케이블과 USB-C to USB-A 동글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두 케이블은 두껍고 튼튼하며 만듦새가 훌륭하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 것은 이어폰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이폰과 비슷한 가격대인 플래그십 스마트폰인 걸 감안하면 아쉽다.
픽셀 XL은 대충 보면 아이폰과 너무나도 흡사한 디자인을 가졌다. 뒷면은 그나마 독특하게 처리했지만 카메라 부분은 또 예전 아이폰과 흡사하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익숙하지만 약간 다른 디자인일 뿐이다. 아이폰처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제품인데, 비교해보니 상대적으로 손에 쥐는 느낌이 좋다. 아이폰보다 가로 폭이 좁고 옆면이 각진 처리가 되어 있으며 살짝 거친 알루미늄 재질 덕분인 것 같다. 또한 아이폰보다 더 가볍다(20g). 화면 크기는 아이폰과 똑같은 5.5인치지만 해상도는 더 높고(2560 x 1440)다. 화면 표시 방식은 AMOLED다. 개인적으로 AMOLED 화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픽셀 XL도 그 점에선 변함 없다. 단지 밝은 날의 시인성은 아이폰과 비교했을 때 훨씬 훌륭하다. 하지만 너무 강하게 강조되는 색감은 여전해서 픽셀 XL로 사진을 찍고 보정한 후 컴퓨터로 옮긴 사진을 보면 내가 보정한 사진과 색감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흔하다. 이 부분은 아이폰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문 센서는 다른 넥서스 스마트폰처럼 뒷면에 있는데,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동작한다. 아이폰처럼 앞면에 있었으면 내려놓았을 때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불만이 있지만, 픽셀 XL 안에 들어있는 스마트 락 기능 덕분에 대부분의 경우 암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쉽게 잠금 해제를 할 수 있어 큰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너무 잘 다듬어 놓았다. 처음 시작부터 아주 부드럽게 단계별로 진행하며 기종에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으로부터 데이터를 옮길 수 있는 기능을 거치게 한다. 기본적인 세팅을 마치면 기존 레퍼런스폰과는 다른 둥글둥글한 아이콘과 상단의 날씨 정보, 그리고 구글 버튼이 눈에 띈다. 앱 메뉴가 사라졌는데 아래 독에서 위로 올리면 볼 수 있다. 알림창은 똑같지만 밤에 숙면을 도와주는 ‘Night Light’과 블루투스를 통해 주변에 통신할 수 있는 기기를 찾아 알려주는 ‘Nearby’ 버튼이 생겼다. Night Light의 경우 아이폰과 비교했을 때 좀더 노란 화면으로 보이고 시간에 따라 천천히 진해지기보다 해 지는 시각이나 정해진 시각에 맞춰 색이 확 바뀌는 탓에 갑자기 변하는 화면색을 보여 조금 놀랄 때가 생긴다. 그 외 추가적인 제스쳐 기능이 생겼는데 뒷면의 지문 센서를 이용해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면 알림창이 내려오고 전원 버튼을 두 번 누르면 카메라 실행, 카메라를 실행한 상태에서 픽셀을 좌/우로 두 번 흔들면 후면 또는 전면 카메라로 바뀐다. 또한 설정에는 고객 지원 탭이 따로 생겨 24시간 전화 통화 또는 채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영어를 할 줄 알아야 겠지만.
다른 장점은 2년 소프트웨어 지원. 아직 안드로이드 7.0이 전체 안드로이드 분포에서 0.1%도 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업데이트 보장은 무척 중요하다. 나는 언제나 깔끔하고 최신으로 업데이트 되는, 그리고 보안상으로 항상 안전한 스마트폰을 원한다. 그 점에서 픽셀 XL은 몇 안 되는 만족스러운 안드로이드폰 중 하나다. 나에겐 아이폰과 레퍼런스폰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도 익숙해진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 5.0 롤리팝이 현재 안드로이드 OS 점유율 35%를 기록하는 걸 보면 이런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다.
픽셀 안에 탑재된 소프트웨어 중 구글이 가장 강조한 기능은 구글 어시스턴트일 것이다. 기존의 구글 나우 카드 윈도우는 유지하면서 아이폰의 시리처럼 홈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대화형 어시스턴트가 나오면서 음성으로 다영한 것들을 물어보고 시킬 수 있다. 이리저리 사용해본 결과 아이폰 보다는 확실히 낫지만 그렇다고 크게 좋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구글 어시스턴트는 질문 후 그와 연결되는 질문을 해도 관련된 답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는 상황도 여전히 꽤 있었고 무엇보다 인식률 자체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까진 시리보단 쓸만하지만 굳이 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다.
이는 픽셀에 탑재된 구글 알로와 듀오도 마찬가지다. 애플의 페이스타임과 아이세메지와 경쟁하기 위해 출시된 앱이지만 실제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기에 구글 알로는 기본 메신저 앱으로 지정할 수도 없다. 픽셀을 처음 받으면 기본 메신저 앱과 행아웃, 알로가 들어있는데 메신저 앱만 세 개다. 행아웃은 거의 버려진 상태고 메신저 앱은 너무 기본적이며 알로는 제대로된 지원 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외는 내가 전에 사용하던 넥서스 6P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빠르고 깔끔하며 화려하지 않고 담백하다. 있을 건 있고 필요없는 건 가지를 잘라낸 느낌이다. 여기에 구글은 사용자를 위한 편의 기능을 살짝 추가했는데 조금 부족하다. 메세지 앱은 정확하게 이거 쓰라고 나에게 던져줬으면 좋겠다. 아이폰 7처럼 기기를 들어올리면 자동으로 화면이 켜졌으면 좋겠다. 구글이 추가할 디테일은 아직도 많다.
카메라
구글이 픽셀을 공개했을 때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뛰어난 카메라 화질이다. DxOMark에서 89점을 받았는데 스마트폰 중 가장 높은 점수다.
픽셀의 카메라 화질은 놀랍다. 특히 아이폰 7 플러스와 비교했을 때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선명한 디테일이 눈에 띈다. 이는 특히 광량이 적은 환경에서 심하게 차이가 났는데 아이폰은 수채화 현상으로 디테일을 뭉개는 반면 픽셀은 디테일을 최대한 살린 결과물을 볼 수 있다. 여기에 4K 동영상과 EIS(Electronic Image Stabilization)은 또다른 서프라이즈였는데 소프트웨어로 처리한 손떨림방지는 생각보다 너무 잘 작동해서 웬만한 움직임은 아주 부드럽게 찍힌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비교글을 따로 쓸 예정이다. 하지만 화질만으로 따졌을 때 픽셀이 아주 가볍게 아이폰 7 플러스를 제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폰의 인물 모드를 애용하는데 덕분에 사진 찍는 재미는 여전히 아이폰 7 플러스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플러스가 아닌 일반 아이폰 7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픽셀 XL이다.
다만 유일한 단점으로 직광 상황에 플레어 현상이 일어나는데 좋게 보면 독특한 느낌, 나쁘게 보면 사진을 망치는 결과물을 보여준다. 사용하면서 직광으로 사진을 찍을 상황이 많지 않아서 자주 접하진 않았지만 애초에 없어야 할 문제가 있는 건 아쉽다.
반면 픽셀만의 또다른 장점이 있다. 바로 구글 포토 무제한 업로드다. 픽셀만을 대상으로 기기에서 업로드 되는 모든 사진과 동영상을 최대 화질로 무료로 업로드 할 수 있다. 다른 기기에선 무료로 업로드 하려면 어느정도 사이즈 & 용량 제약에 비해 아주 큰 혜택이다. 특히 4K 동영상 업로드도 지원하기 때문에 용량 걱정 때문에 1080P로 촬영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과 동영상 백업은 픽셀을 쓰는 것만으로 걱정을 덜었다.
배터리
픽셀 XL은 3,450 mAh 배터리를 탑재했는데 덕분인지 일상적인 사용에 충분한 대기 시간을 보여준다. 그 중 하루는 약 50% 밝기에서 총 8시간 대기 시간동안 간단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확인 등으로 사용했는데 화면을 약 4시간 동안 켰는 데도 충전하기 전 배터리를 보니 25% 정도 남았다. 중간에 별다른 충전 없이도 동영상이나 게임 등을 즐기지 않는다면 하루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고속 충전 지원(USB Power Delivery)으로 25%에서 100%까지 약 한 시간 30 정도 걸렸다. 배터리로는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무난하다.
내가 선택할 유일한 안드로이드폰
만약 기본기가 충실하고 깔끔한 안드로이드폰을 원한다면 픽셀 외에 이제 선택권이 없다. 넥서스 라인의 튼튼한 기본기와 훌륭한 업데이트에 최고의 카메라 탑재로 다른 경쟁사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도 꿀리지 않고 자잘한 부가 기능으로 디테일을 더했다. 넥서스에서 경험했던 부족함이 채워진 픽셀은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이상적인 안드로이드폰에 아주 가까워졌다.
나는 아직도 아이폰 7 플러스를 메인으로 사용 중이다. 하지만 예전엔 넥서스 6P를 집에 두고 다닌 반면 요즘은 아이폰 7 플러스와 픽셀XL을 함께 갖고 다닌다. 두 5.5인치 폰을 동시에 가지고 다니는 건 생각보다 몹시 귀찮은 일이지만 그럴만큼 픽셀 XL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것을 즐기고 있다. 아이폰에서 즐겨 사용하는 앱들은 거의 대부분은 안드로이드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특정 작업 외에는 픽셀 XL을 대신 쓸 때도 있다. 지금까지 쏟은 돈을 생각하면 난 여전히 아이폰을 쓰게 된다. 하지만 아이폰 사용 빈도가 줄어드는 건 아이폰 3GS를 사용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깔끔한데 매력이 조금 부족한 소프트웨어만 좀 더 신경써 준다면 좀 더 나를 강하게 유혹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