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들어 지도 앱을 연다. 검색창에 ‘Katowice, Poland’를 써 넣는다. 세계 지도가 빠르게 오른쪽으로 돌아가더니 폴란드 남쪽의 한 지역을 화면 한 복판에 띄운다. 엇, 생소한 곳이다. 혹시 유명한 곳인데, 내게만 낯선가 싶어 여행 앱을 띄운다. 또 카토비체를 검색어로 넣는다. 목록이 뜬다. 그리 길지는 않다. 어렴풋하게 나마 ‘아! 여기~’라며 풍문을 주워 담아 놓은 기억을 끄집어낼 만한 이름은 없다. 확실히 낯선 곳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가 e-스포츠의 성지로 거듭나는 이 도시를 더욱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지 모른다.
카토비체 정보를 열심히 모았던 이유는 인텔 익스트림 마스터(Intel Extreme Master, 이하 IEM) 때문이다. IEM 시즌 11 최종전 IEM 월드 챔피언십이 3월 3일부터 5일까지 카토비체에 있는 스포덱(Spodek)에서 열려서다. IEM은 지난 2006년 시작해 시즌제로 운영되고 있는 초대형 e스포츠 이벤트. 시즌마다 대륙별 대표 도시 1~2곳을 골라 <스타크래프트2>, <카운터 스트라이크 : 글로벌 오펜시브>, <LOL>, <오버 워치> 등 대회를 치른다. 지난 해 12월 16일부터 18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실내 체육관에서 시즌 11의 제3대회 ‘IEM 경기'(IEM Gyeonggi)를 치르기도 했다. IEM 시즌 8(2013~2014)부터 세계 챔피언을 고르는 최종전을 개최했던 카토비체는 이번 시즌 11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월드 챔피언십’의 도시로 일찌감치 낙점돼 있었다.
하지만 지난 3일 밤 늦은 밤에 밟은 카토비체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IEM 대회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여전히 정체 모를 도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선 것이 사실이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보면 조금 안심될 것이라는 기대마저 어두운 길을 내달려 숙소에 도착할 까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다행히 막연하게 찾아간 도시에 대한 어색함은 이튿날 떠오른 해와 함께 무뎌졌지만, 여전히 ‘왜 카토비체인가?’라는 의아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답은 인텔 익스트림 마스터가 열리는 스포덱(Spodek)에 가야만 찾을 수 있을 듯했다. 토요일의 이른 아침, 스포덱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우리의 외곽순환 고속도로 같은 길을 달려 15분 만에 스포덱으로 통하는 바로 옆 인터내셔널 컨퍼런스 센터의 출입구에서 멈췄다. 그런데 버스가 입구에 다다르기 전에 본 흥미로운 한 장면을 포착했다. 긴 인간 띠가 컨퍼런스 센터 건물 모퉁이까지 이어진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직 입장 전 대기 줄이겠지’라는 여겼다. 물론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행사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절대 배지와 태그를 받고 IEM 후원사 전시 공간이 있던 인터내셔널 컨퍼런스 센터에 들어갔을 때 이미 많은 관람객으로 공간이 채워지고 있던 상태였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보았던 인간 띠의 실체가 궁금했다. 전시 공간을 재빠르게 훑어 본 뒤 곧바로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스포덱으로 달려갔다. 관계자의 양해를 얻어 2층 테라스로 나간 뒤 스포덱 정문이 보이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에 나는 당황했다. 일일이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수많은 사람들이 지그재그로 줄을 만들고 IEM 월드 챔피언십이 열리는 스포덱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장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을 보자 마자 ‘왜 카토비체인가?’에 대한 모든 답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IEM 월드 챔피언십이라는 e스포츠 이벤트를 보기 위한 ‘관중’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카토비체의 인구는 2012년 기준 31만여 명에 불과하다. 소규모 도시인 데다 가까운 대도시도 없는 이곳에 1만 명을 조금 넘게 수용하는 스포덱을 꽉 채우고 남을 것 같은 관람객이 찾아 온 것 자체가 놀라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100만 명이 살고 있고 1천만 명이 있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바로 옆에 두고 펼쳤던 IEM 경기에서도 이런 줄은 본 적이 없는 데… 비록 폴란드 전역이나 일부 유럽에서 찾아 온 참관객을 감안하더라도 대부분은 지역 거주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IEM은 이들에게 특별한 이벤트로 자리잡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IEM 월드 챔피언십을 지역에서 벌이는 단순한 e스포츠 정도로 여기고 잠시 머물다 간 정도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IEM 월드 챔피언십의 모든 것을 즐겼고 활기를 만들었다. 게이밍 전시회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한 후원사 부스는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인텔, HP, 레노버, 에이수스, 에이서 등 게이밍 PC 제조사와 가상 현실 플랫폼 오큘러스, 로지텍이나 하이퍼X, 킹유인 등 부품 제조사는 그냥 제품을 홍보하려는 목적의 쇼룸을 만든 게 아니라, E3나 지스타처럼 누구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부스를 만들었다. 디제잉으로 게임 잔치의 분위기를 북돋은 스프라이트, 3D 프린터로 이용자가 원하는 색깔의 면도기를 뽑아주던 질레트도 참관객을 유혹했다. 다채로운 코스플레이어들도 스포덱과 인터내셔널 컨퍼런스 센터 사이에서 수많은 이들의 카메라 앞에서 한껏 멋을 뽐냈다. 곳곳에 비치해 놓은 수많은 VR 장비들은 360도 라이브로 경기 장면을 생중계했다. e스포츠 선수들의 유니폼을 파는 매장마다 손님 맞이가 한창이었다. 어딜 가든 볼 거리는 풍부했고, 즐길 거리가 널려 있었다. 선수의 경기만 보고 돌아 가던 e스포츠 행사와 전혀 다른, 오히려 게임 전시회에 들어온 느낌이 더 강했다.
그렇다고 IEM 월드 챔피언십의 본질을 외면한 채 이 곳에만 몰려 있던 것은 아니다. 대전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진지하고 뜨겁게 e스포츠를 대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토요일 오후 스타크래프트2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던 인터내셔널 컨퍼런스 센터 안쪽 오디토리엄으로 갔다. 사실 이곳을 찾게 만든 것은 이날 예선 경기 중 한국 선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오디토리엄 앞에 찾아갔을 때 그 앞에 늘어선 줄이 의아했다. ‘이미 경기가 진행 중인데 이들은 왜 들어가지 않았을까?’하는 이유였다. 그 답은 경기장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미 경기장의 모든 좌석이 거의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의 팬으로써 응원을 보내고, 멋진 승부가 펼쳐질 때마다 함성을 질렀으며, 승리에 함께 환호하고 기뻐했다. TV로 보는 게 아니라 이곳에 앉아 있는 모든 이와 함께 호흡하는 동안 진짜 e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다.
이 같은 모습은 일요일 오후 스포덱 메인 무대에서 각 종목의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결승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1층은 물론 힘들게 계단을 올라야 하는 꼭대기 층까지 중앙 무대를 볼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좌석은 빈 곳을 찾는 게 힘들 만큼 빼곡하게 사람들로 채워졌다. 전날 오디토리엄에서 보던 그 모습이 수십 배 규모로 커진 것이다. 이들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때론 함성을 지르고, 때론 탄식을 내뱉으며 점점 경기 속에 동화되어 갔다. 팽팽한 경기 중 짧은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커다란 걸개 그림을 펼쳐 선수에게 힘을 불어 넣는 팬들의 응원전도 쏠쏠한 재미였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에 일희일비 몰입하며 순간의 감정을 마구 토해내는 관중, 열광적인 팬 클럽의 신나는 응원전은 우리의 e스포츠에서도 낯선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이 역사가 되고 있는 반면 이곳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IEM 월드 챔피언십이 열리는 카토비체를 e스포츠의 성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난 4시즌 동안 IEM 월드 챔피언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카토비체가 e스포츠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던 배경에 열정 넘치는 참여자들이라는 순수한 이유만 있다고 보긴 어렵다. 도시의 경제 기반이나 시기, 문화적 특성 같은 외부적 요인도 상당 부분 작용한 게 사실이니까.
광공업 중심 도시였던 카토비체는 관광처럼 경제 기반을 확장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으나 앞서 설명한 대로 다른 지역에 비해 관광 자원을 넉넉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더구나 IT와 관련된 인프라, 공항이나 교통 같은 사회 간접 시설 면에서도 다른 곳에 비해 나은 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적은 도시 인구 역시 대규모 행사를 치를 때 흥행을 걱정해야 할 조건이었다. 어쩌면 IEM 월드 챔피언십을 주관하는 ESL이 4년 전 카토비체를 최종전 장소로 고른 것은 정말 모험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토비체는 IEM 월드 챔피언십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카토비체 시 관계자는 독일, 체코, 이탈리아, 러시아 같은 유럽과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편한 카토비체의 지리적 특성을 강조했다. 유럽 각지로 통할 수 있는 도시라는 강점을 활용해 카토비체가 IEM 월드 챔피언십을 개최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도시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늦겨울에 열리는 IEM 월드 챔피언십의 특성을 활용해 이 시기 대형 이벤트가 거의 없는 도시의 문화 행사로 홍보하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4시즌을 보낸 지금 가능성만 존재했던 방정식의 해답이 어느 정도 풀린 듯한 모습이다. IT와 관련한 대형 이벤트를 열 가능성이 앉은 조건을 가진 카토비체에 IEM 월드 챔피언십이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초대형 IT 이벤트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또한 주관사인 ESL은 IEM 월드 챔피언십을 대결을 위한 e스포츠 대회로만 준비한 게 아니다. 이번 IEM 월드 챔피언십은 e스포츠와 게임 전시회를 결합한 종합 게임 축제의 성격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PC 게이밍과 관련된 최신 기술을 담은 하드웨어를 접하면서 세계적 프로 게이머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니… 게임 코드를 공유하거나 최신 게임을 선보이는 다른 게임 전시회와 다른 IEM 월드 챔피언십 만의 그림을 카토비체에서 그려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라는 물감이 없다면 무의미한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게임은 어떠한 규제나 제재 대상이 아니기에 누구나 마음을 열고 e스포츠 이벤트에 참여하며 게임으로 소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게임을 떠올렸을 때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회적 냉대가 카토비체에는 없다. 비록 산업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게임 산업이 더 발전했을지 몰라도 게임을 즐기고 이벤트를 대하는 자세에서 카토비체가 훨씬 더 나은 것이다. 한 때 우리의 마음이 그랬던 때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마음 만큼은 부럽다. 지금도 카토비체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