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노버가 지난 해 CES에서 처음 공개했던 게이밍 브랜드 ‘리전'(Legion)의 제품들은 일반적인 게이밍 PC의 법칙을 따랐다. 고화질 게임을 즐기기 위한 고성능 프로세서와 그래픽 칩셋을 우람한 덩치의 본체에 담고 화려한 LED 키보드와 검붉은 장식을 얹어 내놓았던 것이다. 당시 세분화되는 PC 시장에서 성장이 예고된 게이밍 부문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게이밍 브랜드도 없고 게이밍 PC의 경험 마저 부족했던 레노버의 최선은 다른 게이밍 시스템을 벤치마크하는 것이었다.
리전을 선보인 이후 레노버는 게이밍 관련 이벤트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리기에 나섰다. 세계적 게임 전시회마다 빠짐 없이 레노버의 부스를 차렸고, 여러 게임 대회의 후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해 아직 쌓이지 않은 브랜드 인지도와 게이밍에 특화된 기술력을 내놓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등 이제 2년차에 들어선 게이밍 브랜드가 기존의 방식을 써서 게이밍 브랜드를 따라 잡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레노버는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 듯하다. 발빠르게 태세를 전환해서다. 이미 게이밍 시스템의 뿌리를 내린 오래된 브랜드와 직접 경쟁을 피하는 쪽으로 리전의 방향성을 정했다.
사실 앞서 나온 대부분의 게이밍 PC 브랜드는 골수 게이머들을 겨냥해 극한의 성능을 끌어 올리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가의 게이밍 시스템 전략을 구축했던 터라 이를 벤치마크해 리전의 경쟁력을 내세우는 힘든 일이긴 했다. 때문에 레노버는 지난 E3에서 전혀 다른 리전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마니아를 겨냥한 고가 브랜드 전략 대신 게임을 즐기려는 일반인을 위한 보편적인 게이밍 시스템으로 리전을 브랜딩하는 것이다.
한국 레노버는 이러한 게이밍 전략을 7월 20일 서울 청담 시네시티에서 가진 리전 제품 발표회에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현재 게임을 즐기는 트렌드를 분석하면서 리전의 수요층을 ‘덕후’스러운 마니아보다 특정 시대의 게임을 경험을 공유하거나 홀로 여유를 즐기는 80%의 일반 게이머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레노버는 리전을 게이밍 성능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외형은 일반적인 제품에 가깝게 설계했다. 앞서 게이밍으로 느껴질 과격한 형태를 벗어나 비즈니스 제품처럼 보일 수 있는 단조롭고 깨끗한 형태의 게이밍 시스템으로 재정비한 것이다. 리전 노트북은 마치 업무용처럼 만들어 어디에나 들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게 만들었고, 데스크톱 역시 화려함보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깔끔한 만듦새로 정리했다.
무엇보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성능의 게이밍 시스템을 확장한다는 리전의 전략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결국 가격이다. 8세대 코어 i5 프로세서와 GTX 1050 Ti를 탑재한 보급형 신형 리전 Y530 노트북을 90만원대에서 살 수 있는데, 이는 일반적 외형의 노트북에 게이밍 성능을 바라는 이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고성능 데스크톱과 테이블톱 제품도 110만원부터 시작한다.
가격은 낮췄어도 게이밍 시스템에 요구되는 기본적인 특성을 반영하려 애썼다. 리전 노트북은 듀얼 멀티 블레이드 팬과 긴 냉각 히트 파이프로 발열과 냉각 성능을 강화했고, 엔비디아 G싱크와 호환되는 144Hz의 패널을 채택했다. 리전 데스크톱 Y730은 서버용 리퀴드 쿨링을 도입하는 한편 공기흐름을 개선해 조용하면서도 오버클럭에 대응하는 능력을 높였다.
단지 리전은 그 이상의 기술력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게이밍을 위해서 필요한 구성은 갖췄을 뿐, 그 이상의 요구에 대해선 일단 선을 긋고 있다. 중요한 점은 레노버가 리전의 방향성을 대중성으로 잡고 가격을 낮춘 보편적인 게이밍 시스템을 내놓것은 분명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한 측면에서 볼 때 수긍이 되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낮은 게이밍 브랜드 인지도의 약점과 아직 경쟁 우위를 말하기 어려운 기술력, 그리고 종전 레노버에 투영된 브랜드에 대한 인식을 모두 살폈을 때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인 셈이다.
그런데 대중적인 게이밍 시스템으로 판매하려는 이 전략은 지금 수준의 레노버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한편으로 안타까운 점도 있다. 분명 수익을 위한 측면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더라도 리전이라는 게이밍 브랜드가 지금의 레노버 이미지에 너무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게이밍 브랜드들이 브랜드 자체를 고급화하는 전략을 쓰는 것은 기존 PC 제조사 이미지와 차별화는 물론 게임을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대상을 흡수해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배경이 깔려 있다. 반면 리전은 가격 대비 성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레노버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 새로운 이미지로 넓히기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분명 브랜드의 역사가 짧아 빠르게 전략을 수정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전략을 또 수정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 이제부터 레노버는 리전의 카테고리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데 아직 여기까지 고민하지 않은 모양이다. 20일 발표회에서 한국 레노버 강용남 대표는 리전을 어떤 카테고리를 말할 수 있는 묻는 질문에 그냥 ‘레노버의 게이밍’이라고 했다. 애석하게도 리전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답은 아니었다. 게이밍의 한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의 중요도를 지금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걸 알 때가 됐을 땐 비슷한 전략으로 시장에 뛰어든 경쟁자들을 보게될 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