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사무실의 책상 위에 모니터가 한 대 뿐이에요. 하지만 가상 현실 안에선 맞춤식 설정을 할 수 있고 나는 서로 다른 디스플레이에서 하던 작업들을 들어온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답니다.”
비몽사몽하던 순간 들린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의 이 한 마디에 쏟아지던 잠이 달아나 버렸다. 다른 때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새벽 2시. 애플도, 구글도 아닌 그다지 인기 없는 페이스북의 가상 현실 개발자 행사 ‘오큘러스 커넥트 4’의 첫날 기조 연설을 지켜보는 것이 고역일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자 마치 각성제를 삼킨 것 마냥 정신이 또렷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가상 현실의 핵심 메시지가 그의 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에게 관심을 끈 오큘러스 커넥트 4의 소식은 주커버그가 했던 말보다 페이스북이 200달러 짜리 기어 VR의 대체품인 ‘오큘러스 고'(Oculus Go)를 내놨다는 것이다.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과 기어 VR 등 값비싼 하드웨어를 준비하지 않아도 기어 VR에 탑재했던 오큘러스 모바일 플랫폼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200달러짜리 독립형 헤드셋은 정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스북과 끈끈한 동반자 관계임을 강조하던 삼성도 재빠르게 구글 데이드림 VR 플랫폼의 지원을 결정했지만, 이용자의 접근성과 혁신성을 높이겠다고 선언한 오큘러스 고에 대한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0달러 짜리 오큘러스 고와 ‘프로젝트 산타크루즈'(Project Santacruz) 같은 눈길을 끄는 하드웨어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주커버그의 모두 발언과 함께 연말 업데이트를 예고한 오큘러스 코어 2.0은 오큘러스 커넥트 4 기조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읽힌다. 주커버그의 이야기는 가상 현실에 대한 핵심을, 그 뒤에 공개된 오큘러스 코어 2.0은 그 메시지의 실행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주커버그의 말은 단순하면서도 가상 현실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상 현실은 시각적으로 구성된 공간일 뿐, 실제처럼 느껴져도 실제는 아닌 공간이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구성된 이 공간은 끝없이 확장하고 재배치 할 수 있다. 현실처럼 어떤 유형의 공간으로 굳이 정의하지 않아도 가상 현실 안은 공간 자체를 끝없이 늘리거나 복제할 수 있기에 이 무한한 시각적 공간을 활용하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가상 현실의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오큘러스를 인수한 페이스북 조차 그랬다. 극장처럼 현실과 비슷한 공간을 가상 현실로 옮겨두거나 PC의 1개 스크린을 가상 현실로 복제하기만 했지, 가상 현실의 공간 자체를 늘리거나 그 안에서 다른 디스플레이를 재배치할 수 있는 기능을 내놓지 않았다. 주커버그가 가장 현실 안에서 서로 다른 디스플레이를 띄운 뒤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가상 현실의 가능성 중 하나지만, 실제로 구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론적인 가능성을 실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 것이 오큘러스 커넥트 4에서 발표한 오큘러스 코어 2.0이다. 오큘러스 리프트 이용자에게 배포될 오큘러스 코어 2.0 업데이트는 이용자가 직접 꾸밀 수 있는 새로운 오큘러스 홈(Oculus Home)과 ‘오큘러스 대시'(Oculus Dash)라 부르는 작업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종전 오큘러스 홈은 단순히 앱의 실행과 관리, 스토어 접속 같은 단순한 메뉴를 공간에 배치할 뿐 공간 그 자체를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오큘러스 홈은 이용자가 원하는 대로 공간 자체를 꾸밀 수 있게 된다. 우주나 바다 위에 홈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에 놓을 탁자, 장식품, 놀거리 등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 오큘러스 홈 자체가 가상 현실 세계에서 이용자의 집이 되는 셈이다.
종전 유니버설 메뉴를 개선한 오큘러스 대시는 윈도 데스크톱을 가상 현실로 옮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러 창을 띄워서 작업하던 윈도 데스크톱처럼 오큘러스 대시 역시 여러 데스크톱 PC 프로그램을 띄워서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모든 PC 프로그램과 호환되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오큘러스 대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데스크톱 앱을 오큘러스 대시에서 곧바로 실행시킬 수 있다는 점과 창의 크기를 줄이지 않고 공간 전체에 동일한 크기의 디스플레이를 수십 개 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라면 24인치 모니터 한 대만 볼 수 있지만, 오큘러스 대시 안에서는 각 프로그램이 실행된 수십 개의 가상 모니터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웹사이트를 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리프트 코어 2.0의 오큘러스 홈과 오큘러스 대시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페이스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데스크톱 컴퓨터의 바탕 화면과 작업 전환을 가상 현실에서 완벽하게 대체하는 변화를 담고 있다. 지금까지 오큘러스 같은 가상 현실은 윈도 데스크톱의 보완적 측면으로 실행했다. 가상 현실의 실행이 끝나면 이용자는 헤드셋을 벗고 데스크톱으로 돌아가 마우스로 프로그램을 실행해야만 했다. 반면 리프트 코어 2.0의 홈과 대시는 보완이 아니라 그 자체를 데스크톱의 대안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준비를 해 놓은 상태다. 계속 가상 현실 헤드셋을 쓴 채 더 넓고 자유로운 가상 현실 공간에서 컴퓨팅을 할 수 있으니까. 더구나 마우스를 쓰지 않더라도 오큘러스 터치 컨트롤러와 손가락으로 종전 응용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마우스를 쓰지 않는 컴퓨팅의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휴고 바라가 밝힌 하루 평균 50분 정도 이용하고 있는 가상 현실의 활용 시간이 리프트 코어 2.0 이후 어떻게 바뀔지 두고볼 일이다.
아마 오큘러스 리프트를 쓰고 있는 이들은 리프트 코어 2.0이 단순한 업데이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겠지만, 어쩌면 페이스북은 그 이상을 준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가상 현실이 아주 오래된 데스크톱 컴퓨팅 경험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정적이고 수동적인 윈도 데스크톱을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가상 현실이 대체한다면 윈도의 존재, PC의 존재도 바뀌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첫 출발이 리프트 코어 2.0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