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노버가 IFA 전시회에서 수많은 신제품 발표회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식으로 대규모 발표 행사를 연 것은 지난 해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에 불과하다. 그나마 지난 해 발표회 마저 홀리데이 제품 발표회라는 이름으로 가을부터 연말까지 이어지는 성수기 시즌에 대비한 노트북과 AR, 스마트폰 등 제품들을 공개했던 터라 PC 중심 전략을 발표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레노버가 IFA에서 PC 중심의 제품 발표회를 연 것은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지난 해 발표했던 PC 제품과 올해 제품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지난 해 발표는 스타워즈를 테마로 삼았던 것을 빼면 특색을 거의 찾을 수 없는 두어 가지 노트북만 내놓은 채 마무리한 탓에 레노버의 PC 전략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PC 시장의 흐름, 기술적 변화,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전혀 읽을 수 없는 제품이 무대를 장식했다. 이와 달리 올해 개최한 레노버 테크 라이프 18은 철저하게 PC 전략과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신제품을 쏟아낸 터라 메시지가 주는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요가, PC 트렌드의 키워드를 잡다
이번 발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요가(Yoga) 시리즈의 변화다. 레노버 요가 시리즈는 화면을 360도 접는 플립 노트북 디자인의 대표 라인업이다. 레노버는 노트북을 태블릿 같은 터치 장치로 활용할 수 있는 투인원 PC 컨셉트 분야에서 플립 디자인으로 된 요가 PC 제품군으로 문을 연 이후 이 분야를 주도해 왔다.
확실히 처음 출시했던 요가는 뒤로 접는 혁신성 자체는 인정할 만했다. 단지 접어 들었을 때 두께와 무게의 영향을 받는 휴대성과 만듦새에서 공감을 얻지 못했던 터다. 레노버는 지금까지 오래된 문제를 해결한 얇고 가벼우면서 스타일리시한 요가 제품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고 최근 그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번 IFA 2018 레노버 이벤트도 그런 노력을 확실히 선보이는 자리였다.
앞서 소개했던 요가북 C930은 곧 보게 될 듀얼 스크린 노트북의 시작점이다. 물리 키보드를 없애고 두 개의 스크린을 활용하는 노트북은 에이수스 같은 다른 PC 제조사들도 준비하고 있는 폼팩터지만, 레노버가 IFA를 통해 좀더 일찍 출시를 예고한 것이다. 컬러 LCD 디스플레이와 e잉크 디스플레이라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투인원 제품이지만, 전통적인 PC에 대한 관념을 누구보다 일찍 깼다는 사실은 중요한 부분이다.
요가북 C930과 이름이 거의 비슷한 요가 C930도 있다. 사실 이 제품이 이번 IFA에서 공개한 차세대 요가 제품군 가운데 새로운 주력 제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가 C930은 힌지의 만듦새가 매우 특이한 제품이다. 보통 요가 힌지는 화면과 키보드 양옆을 지탱하는데, 요가 C930은 힌지가 매우 길다.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다. 이 힌지는 사운드바 역할을 한다. 힌지 안쪽에 고음을 뽑아내는 트위터를 내장하고 본체 전체를 우퍼처럼 울리게끔 설계한 덕분에 화면만 보는 스탠드 모드에서 영화를 볼 때 즐거움을 더 높인다. 특히 돌비 비전을 지원하는 14인치 4K 디스플레이와 돌비 애트모스 지원 스피커 시스템으로 더 생생한 화질과 음질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화면 상단의 카메라로 이용자를 훔쳐 보는 카메라 해킹을 막는 트루 블록 프라이버시 셔터 기능도 추가하는 등 개인 보안도 강화했고, 감도와 반응성 좋은 충전형 스타일러스 펜을 본체에 내장할 수 있어 터치 스크린의 작업 효율성도 매우 높였다. 뒤로 돌려 접었을 때 완전히 접히는 느낌이 덜했던 기존 요가 노트북과 달리 틈새가 딱 맞물리게 다듬은 데다 접은 순간에도 마치 하나의 제품처럼 보이도록 형태까지 잘 잡아 완성도를 높였다.
레노버 요가의 다양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냅드래곤을 탑재해 항상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로 재충전 없이 25시간 동안 작동하는 요가 C630 WOS(Windows On Snapdragon)도 공개했고, 다른 고급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학교를 겨냥한 크롬북 요가도 발표했다. 비록 화면을 돌려 접는 요가 폼팩터는 모두 똑같을 지라도 똑같은 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만큼 제품의 다양성을 갖췄다.
무엇보다 이번 IFA의 요가 제품의 메시지는 앞서 하나의 제품에서 두 가지 제품으로 변형할 수 있는 투인원 PC 시장의 한 축을 이끌었던 요가의 혁신 이미지를 최신 PC 트렌드와 결합시켜 다음 단계로 진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단순한 접이식 투인원 노트북의 이미지로 머물 수 있었음에도 듀얼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거나 항상 네트워크에 연결된 올웨이즈 커넥티드(Always Connected) PC처럼 PC 업계에서 머지 않아 보게 될 최신 트렌드를 요가에 맨 먼저 접목시켜 혁신적 PC라는 이미지를 지속하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해 형태와 재질 등 만듦새를 가다듬고, 무게와 두께까지 줄여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를 미숙한 완성도에서 볼 수 있던 찌꺼기를 제거하고 프리미엄 노트북의 신선도를 높인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게이밍을 말하다
확실히 레노버 IFA 제품 이벤트의 주인공인 요가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레노버를 성장시켜 잠시 빼앗겼던 PC 시장 1위 타이틀을 되찾아 준 동력은 얇고 가벼운 요가만이 아니다. 레노버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표 켄 웡(Ken Wong)은 IFA 전시회 기간 동안 레노버 부스에서 진행했던 그룹 인터뷰에 워크스테이션과 게이밍, 서비스에서 두 자릿수의 견고한 성장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번 IFA에서 게이밍 PC 제품을 따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켄 웡 대표는 게이밍에 대해 특별히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사실 레노버의 게이밍 전략은 IFA에 앞서 레노버 게이밍 브랜드 리전(Legion)의 국내 발표회에서 정리한 대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을 즐기는 이들을 공략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실제 이 전략으로 레노버는 짧은 게이밍 브랜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난 분기 게이밍 PC 부문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게이밍 부문의 좋은 성적과 별개로 나는 레노버 리전의 방향이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게이머의 문화에 어울리는 쪽은 아니라고 여겼다.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머신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기술적 허점도 많고, 게이머들의 문화를 융합하는 역사가 너무 짧아서다. 아마도 이러한 약점들은 켄 웡 대표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들의 질문에 켄 웡 대표는 레노버가 그런 결정을 했던 이유들을 매우 자세히 답했다.
켄 웡 대표는 게이밍 시장에서 얻은 결과가 단순히 내부적인 결정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게이밍 PC 전략은 부서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의 의견을 받아 들이도록 의사 결정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노버는 리전 브랜드를 내놓은 이후 700여명의 게이머들과 오랫 동안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하며 철저하게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그 중 38%의 답변자들의 공통된 의견을 통해 보편적인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이러한 의견이 전체 리전 라인업을 새롭게 정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평상시 게임을 즐기면서도 가볍게 생산성을 위한 업무용 프로그램이나 메일 확인, 넷플릭스나 스포티파이 같은 캐주얼 엔터테인먼트를 즐긴다는 것이다. 이는 빠른 프로세서와 처리 성능, 쿨링 시스템과 온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코어 게이머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켄 웡 대표의 말이다. 이를 테면 PUBG(PlayerUnknown’s Battleground)의 코어 게이머는 이 게임을 즐기기 위한 머신의 경쟁력을 따지는 것과 달리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결국 레노버는 게이밍의 균형과 만듦새라는 새 항로를 정하고 리전의 방향타를 돌렸다. 여전히 핵심은 게이밍이나 다른 작업의 균형을 고려한 스타일리시한 제품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며 선보인 첫 제품이 지난 여름에 발표했던 리전 노트북과 데스크톱 게이밍 제품들이었고, 결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특히 전략 수정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 곳이 켄 웡 대표가 맡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다. 켄 웡 대표는 현재 게이밍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중국과 일본, 호주까지 모두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고, 이곳에서 리전의 성장 속도도 높아졌다고 밝혔다. 올해 PC와 모바일, 콘솔을 모두 합친 세계 게임 시장 규모는 1500억 달러. 이 가운데 절반을 차지한 아태 지역에서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해 왔는데, 30% 정도를 차지하는 PC 게이밍 역시 두 자릿수를 기록하며 레노버 게이밍 전략의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레노버가 PC 게이밍의 성장을 주도하는 아태 지역에서 신경 쓰는 것은 따로 있다. 게임 커뮤니티와 관계 설정에 더 관심을 보인 것이다. 아시안 게임에서 e스포츠를 시범 종목으로 채택한 것이 레노버의 게이밍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묻자 켄 웡 대표는 그에 기반이 되는 커뮤니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활동을 설명했다.
특히 켄 웡 대표는 레노버의 자체 e스포츠 대회인 리전 챔피언십에 뿌듯함을 느끼는 듯하다. 2년 전 동남 아시아에서 시작한 이 대회는 한국, 홍콩, 대만을 포함한 10개국가로 확대됐고 꾸준히 규모를 늘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여름 리전 챔피언십 지역 예선을 통해 지역 대표를 선발했다. 그런데 켄 웡 대표는 리전 챔피언십의 목적이 누가 최고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게임 커뮤니티와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게임 실력을 가진 각 나라 대표 게이머끼리 경쟁하는 e스포츠처럼 보이는 리전 챔피언십에 이런 이유가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외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마도 뒤늦게 게이밍 시장에 뛰어든 레노버 입장에서 게이밍 문화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레노버는 리전 브랜드를 내놓은 이후 인텔 익스트림 마스터와 같은 e스포츠 리그나 E3 전시회 등 지난 1년 동안 여러 게이밍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생각과 원하는 바를 얻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리전 챔피언십이었다. 켄 웡 대표는 리전 챔피언십을 진행하는 동안 따로 설문을 하지 않아도 항상 게이밍 커뮤니티와 접촉하고 소통하면서 다양한 피드백을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게이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고, 게이머들이 함께 놀 수 있는 e스포츠의 장을 만든 것. 어쩌면 켄 웡 대표의 이 말이 앞으로 더 커질 수도 있을 PC 게이밍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다른 제조사에게 중요한 힌트가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