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마다 시장조사기관들이 내놓는 PC 시장의 성적표는 날이 갈수록 나아질 기미가 없지만, 그 상황에도 성적을 올리는 PC 제조사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PC 사업 성적을 구성하는 과목들을 살피고 분석한 뒤 하락과 성장 곡선이 달라지는 과목을 구분한 다음, 앞으로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시장 대신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면 성적이 더 오르는 과목에 집중하는 전략은 최근 PC 시장의 순위를 바꾸는 비결이었다.
그 비결의 맥을 제대로 짚은 곳이 HP다. 지난 몇 년 동안 2등으로 내려갔던 HP가 다시 1등으로 올라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HP는 여전히 많은 PC를 판매하지만, 지금 성장하고 있는 시장, 앞으로 성장할 시장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성적 상승 효과를 톡톡히 봤다. 무엇보다 게이밍 및 워크스테이션 같은 고성능 컴퓨팅은 성적표의 곡선을 위로 끌어올리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기에 따라 제품 전략을 빠르게 대응하면서 확장하던 HP Z 워크스테이션의 변화가 흥미롭다. 사실 워크스테이션이 일반 PC에 비해 고성능과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제품의 유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마다 데스크톱, 올인원, 노트북 형태의 워크스테이션을 꾸준히 내놓았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르다. HP 코리아가 12월 27일에 진행했던 HP 워크스테이션 신제품 행사에는 올인원 워크스테이션이 사라졌고, 데스크톱 형태의 제품은 더 작아지거나 실속형으로 바뀌었으며 새로운 제품이 자리를 대신했다.
사실 2018년을 겨냥한 HP 워크스테이션 라인업의 변화는 조금 놀랍다. 특히 HP가 애플의 아이맥 프로 시장을 겨냥했던 올인원 워크스테이션의 퇴출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유가 있다.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터치스크린의 요구가 줄었고, 작아진 워크스테이션 본체를 10억 색상을 표현하는 HP 워크스테이션 모니터 뒤에 붙이는 것이 비용 효율적이라는 측면에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올인원이 제외됐어도 기존 데스크톱과 모바일 워크스테이션은 여전히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 자동차나 건축 등 설계 분야에 알맞은 높은 클럭의 인텔 프로세서와 강력한 엔비디아 쿼드로 GPU, 대량의 램과 저장 공간을 도구 없이 쉽게 확장할 수 있는 편의성은 그대로다.
그런데 HP는 기존 모델에 새로운 성능의 부품으로 강화된 신형 워크스테이션 외에 새로운 두 개의 터널을 뚫는 제품을 공개했다. 투인원(2-in-1) 워크스테이션과 VR 백팩 워크스테이션이다.
미지의 세계인 투인원 워크스테이션 HP ZBOOK x2는 앞서 나온 투인원 태블릿처럼 키보드와 화면부를 분리할 수 있는 구조다. 물론 워크스테이션이라는 특징을 살려야 하는 터라 일반적인 투인원 태블릿과 형태나 성격이 다르다. 보통 태블릿은 들고 다니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 제품은 가볍다는 쪽보다 이동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태블릿 본체 무게만 1.65kg이고 키보드를 더하면 2.17kg에 이른다. 태블릿 본체만 해도 요즘 가벼운 노트북보다 더 무겁다.
하지만 워크스테이션 성능을 발휘하는 초강력 투인원 태블릿이 필요한 이용자에게는 다른 제품이다. 여느 투인원 태블릿과 다르게 이 제품은 8세대 쿼드코어 인텔 프로세서에 엔비디아 쿼드로 그래픽 카드를 내장하고 강력한 듀얼 팬 냉각 시스템으로 열을 뽑아낸다. 화면은 14인치지만, 4K 해상도에 10비트 10억 색상을 표현한다.
HP ZBOOK X2에서 흥미로운 기능은 키보드에서 분리한 뒤에도 키보드와 태블릿이 블루투스로 연동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태블릿은 바닥에 눕힌 채 4,096 압력을 인지하는 터치 펜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키보드 단축키도 함께 쓸 수 있다. 보통 투인원 태블릿을 키보드에 결합하면 화면 터치 작업과 키보드를 동시에 하기 어려운 데 이 제품은 키보드 분리 뒤에도 함께 작동하도록 만들어 그 불편을 없앤 것이다. 또한 태블릿 양옆으로 자주 쓰는 기능을 정의하는 버튼을 넣어 작업 편의성을 높였다.
투인원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새 터널을 뚫는 HP ZBOOK X2에 못지 않게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HP Z VR 백팩이다. 말 그대로 등에 메는 가방인 백팩(Backpack) 워크스테이션이다. 그런데 굳이 등에 멜 필요가 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캐드나 디자인 작업을 하는 워크스테이션을 등에 메고 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최근 가상 현실을 결합한 작업과 활용 분야가 늘자 워크스테이션을 그에 적합하게 변형한 것이다.
HP Z VR 백팩은 본체와 배터리를 모두 포함해 4.6kg 남짓 된다. 그냥 들면 조금 무거울 수 있지만, 등에 메면 무거운 느낌은 들지 않고 움직임도 제법 자유롭다. 무엇보다 가상 현실 HMD와 PC를 연결하는 긴 케이블이 없기 때문에 공간을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크기는 작아도 고성능, 고화질 가상 현실 작업을 위한 워크스테이션이라 인텔 코어 i7 vPro 프로세서와 16GB 비디오 램을 가진 엔비디아 쿼드로 P5200을 탑재했다. 더구나 착탈식 워크스테이션이어서 VR로 쓰지 않을 때 책상 위 도킹 스테이션에 올려 곧바로 모니터에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HP가 Z VR 백팩을 공개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하드웨어 그 자체가 아니다. 90프레임의 고해상도 가상 현실 이미지를 안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 장점이긴 해도, HP는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하는 자동차 및 건축 설계자들이 작업한 결과물을 가상 현실에서 실물로 확인할 때 거쳐야 하는 3D 렌더링의 복잡성부터 없애려 했다.
사실 2D로 설계했으나 실제 결과는 3D인 설계물의 실제 모습을 가상 현실에서 보면 더욱 현실감 있게 확인할 수 있는데, 문제는 CAD 데이터 자체를 가상 현실에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의 모든 CAD 데이터를 가상 현실에서 검토하려면 게임 엔진을 통해 렌더링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CAD 작업자들이 유니티나 언리얼 등 게임 엔진을 다루는 개발자가 아니어서 실제 CAD 작업의 가상 현실 렌더링을 외주로 맡기는 일도 종종 있다.
HP가 이번 Z VR 백팩을 공개하면서 밝힌 핵심은 이 부분이다. CAD 작업자들이 게임 엔진을 거치는 작업을 단순화할 수 있는 도구를 인텔, 유니티와 함께 만들어 2018년 4월에 내놓을 예정이다. 이 도구는 카티야, 마야에서 작업한 데이터를 직접 읽어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도록 렌더링한다. 아마도 이전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텍스처에 대한 정의를 해주게 되겠지만, 한번만 정의해 놓으면 그 뒤 시뮬레이션 과정은 훨씬 단순화될 듯하다. HP가 손잡은 유니티의 경쟁사인 에픽은 언리얼 엔진 기반으로 20개의 CAD 데이터를 읽어 가상 현실을 위해 렌더링하는 데이터스미스(Datasmith)를 출시했는데, HP는 자사 제품 구매자들에게 유니티, 인텔과 개발한 도구를 무료로 제공한다. 다만 HP는 이 도구를 클라우드와 연계한 서비스 형태로 내놓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HP는 설계 분야의 활용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솔루션까지 갖춰 Z VR 백팩 워크스테이션을 내놓고 있지만, 당장 큰 수요를 만들어낼 것으로 장담하지는 않는다. 데이터를 변환 장비로 옮기거나 PC와 모니터를 옮기기 어려운 공간에서 CAD 결과물을 확인하려는 용도, 또는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동시에 참여하며 같은 장소에서 가상 현실을 즐기는 위치 기반 엔터테인먼트(LBE) 시장을 노리지만 이는 많인 수요를 낳는 영역이 아니라서다.
다만 워크스테이션도 지역마다 성향이 다른데다 요구 사항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HP는 여기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터치 환경을 요구하지 않는 작업자들에 의해 올인원 워크스테이션을 단종했듯이 아시아 지역은 모바일 비중이 더 높아 투인원 같은 제품을 개발했고, 가상 현실은 늘어나고 있는 요구에 미래의 수요에 대응한다. 아직 이 분야는 터널을 더 뚫어야 빛이 보인다. 이 터널을 HP가 먼저 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