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는 사라질 것이다.“
모바일 빅뱅이 진행 되자 여기저기서 PC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도발적인 말들이 서슴없이 튀어 나왔다. 그도 그럴 듯이 모바일 시대에 적응 못한 PC 제조사 중 상당수는 커진 몸집을 줄여야 했고, 시장조사기관들은 마치 PC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듯 고꾸라지고 있는 시장 조사 결과를 분기마다 쏟아 냈으니 그 불행한 결말을 예측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라질 거라 지목됐던 PC는 여전히 생존해 있다. 물론 PC만 쓰던 전성기 때와 시장 규모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PC는 모바일의 위협 속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바일 트렌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을 정리한 것은 결국 HP 같은 PC의 생존이 절실했던 PC 기업들이었다. 생존의 비법은 불필요한 조직을 잘라 내고 조정한 준 것만 아니다. 가격대에 맞춰 우후죽순 쏟아지던 PC들을 이용자의 환경에 맞춰 세분화, 전문화, 다양화라는 제품의 조정을 통해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한 뒤 일어난 변화였다.
특히 PC 제품군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변화를 빨리 읽어내지 못했다면 PC 제조사들이 생존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기업의 컴퓨팅 환경이 바뀌고 업무 환경이 바뀐 데다 인적 자원의 세대가 교체되는 등 기존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들이 생겨났다. 결국 PC 제조사들은 업무 환경을 위한 기존의 시나리오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HP는 PC를 써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가장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썼던 기업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업무의 미래’(Future of Work)라는 주제로 보여준 제품 시나리오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기업 시장에 초점을 맞춰 제품을 발표했지만, 업무용 제품 시장의 변화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근거가 조금 약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지적을 HP도 들었는지 7월 24일에 가졌던 ‘미래의 업무’에 대한 세 번째 행사는 앞서 2년의 내용과 사뭇 달랐다. 분명 2019년형 업무용 신제품 발표 행사의 형식은 동일하면서도 제품을 쓰는 환경의 변화를 IDC를 통해 진단하고 공개한 점이 흥미롭다. IDC의 조사 결과 가운데 기업 시장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으로 세대의 변화를 든 부분이 더욱 흥미롭다. 기업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들이 업무 환경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IT에 기반한 사회 변화의 과도기를 겪은 밀레니얼 세대는 그야말로 디지털 환경에 적응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디지털로 소통하고 다양한 일들이 처리되는 사회를 경험한 밀레니얼 세대는 물리적 경계가 약한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에서 기존의 업무 환경을 바꿔야 하는 핵심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IDC의 진단이다. 이미 성장기를 지나 2020년에 아태 지역의 50% 이상 업무 인력을 밀레니얼 세대가 차지할 것이라는 IDC는 예측에 따르면 인공 지능과 함께 밀레니얼 세대에 맞는 업무 환경의 구축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IDC는 밀레니엄 세대의 특성상 회사와 일이 분리된 과거의 방식 대신 이러한 구분이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회의 및 업무, 휴식까지 모두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 여기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업무 공간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에 앉거나 소파에 눕거나 PC로 일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그 자리가 곧바로 업무 공간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자기 자리를 찾아 일하는 기존 업무 환경과 차이가 많이 다른 모습이다. 다양한 능력으로 프로젝트 단위의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며 상호 작용하는 세대의 새로운 업무 문화는 기존 사무실의 모습을 바꿀 동인일 수밖에 없는데, 최근 급격히 늘어난 개방형 오피스도 이러한 세대의 특징을 잘 살린 예다.
이처럼 업무 공간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일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을 업무 환경에 반영하려면 PC와 주변 제품군도 달라져야 한다. 특히 이동성은 기업 혁신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일과 놀이를 병행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테면 휴대하기 쉬운 노트북만 아니라 고성능의 게이밍 노트북이 업무용 노트북으로 활용되는 것도 시대의 변화 중 하나다. 아직 대다수의 기업용 노트북은 이동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업무 유형에 따라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앉은 자리가 곧 일터라는 점은 다른 다른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른 이와 거리를 더 두고 일할 수도 있는 반면, 더 가까운 곳에서 일할 수도 있는 터라 무엇보다 누구나 서로의 업무 내용을 쉽게 들여다보고 노출할 위험이 커진다. 이러한 비주얼 해킹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외부에서 일을 할 때 PC의 취약성을 공격하는 시도도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위협에 대한 기술적 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HP가 업무용 신제품에서 강조한 부분도 제품의 제원보다 밀레니얼 세대의 업무 환경에서 맞딱 드릴 위협에 대한 것이었다. 정면이 아닌 각도에서 화면을 볼 때 그 내용을 거의 보이지 않게 만들어 비주얼 해킹이 불가능한 슈어뷰 디스플레이를 적용하고, 웹캠을 해킹할 수 없도록 쓸 때만 웹캠을 위로 올리는 기술을 신제품에 넣었다. 더불어 학습된 AI로 멀웨어를 방지하는 딥러닝 슈어 센스도 신형 노트북에 넣었다. HP는 1%의 낮은 프로세서 점유율로 20ms의 빠른 시간 안에 멀웨어를 99% 탐지해 내고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탐지하는 딥러닝 슈어 센서를 기업에게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서비스와 기능을 담은 업무용 제품이 HP 엘리트 X2 G4, 엘리트북 X360 1040 G6, 엘리트원 800 AiO(올인원) G5 등이다.
이처럼 밀레니얼 세대의 달라질 변화에 보안이라는 맞춤형 서비스를 포함한 PC와 주변 제품군을 내놓은 HP지만 한쪽에선 다른 고민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프린터 부문이다. 프린터는 디지털화의 가속으로 규모에 대한 걱정이 큰 부문이라서다. 실제 이날 발표에서도 디지털화에서 희생양이 될 수 있는 프린터의 위기감에 대해 먼저 토로한 것도 이러한 인식을 걱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프린터의 쓰임새는 여전하다는 것이 HP의 판단이다. 디지털에 익숙해 있는 밀레니얼 세대라도 여전히 인쇄된 문서를 이용한 업무는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이 잦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업무에 참고하기 위해서 인쇄물을 활용하는 비율이 54%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장치에 익숙해 있지만, 그 장치만 활용하는 완전한 디지털화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전히 프린터의 사용성이 높다면 밀레니엄 세대의 업무 환경에 맞는 프린터는 무엇이냐는 고민이 남는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HP는 프린터의 성능은 논외로 보고 있다. 즉, 1분당 수십장을 뽑고 있는 상황에서 한 장 더 뽑는 속도가 프린터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자유롭게 움직이는 환경에 맞는 기능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스마트폰이나 PC처럼 어떤 장치를 이용하더라도 어디에서나 사무실에 있는 프린터로 손쉽게 인쇄를 하면서도 네트워크로 연결된 프린터에 대한 외부의 해킹 위협을 차단하는 강력한 보안성은 가격을 따지지 않고 HP 레이저젯 프로 M400 시리즈, M507 시리즈, M751 시리즈 등 이번에 공개된 모든 기업용 제품군에 적용했다.
이렇듯 HP는 기업용 PC와 프린터를 쓰게 될 세대를 위해 제품의 성격을 바꿔가고 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밀레니엄 세대의 물리적 경계를 없애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IDC는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의몰입 경험이 소비자 시장에서 밀레니엄 세대가 일하는 업무 환경으로 옮겨지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이에 대한 HP의 준비는 미흡해 보인다. 기업에서 직무 교육과 소매 판매 분야 등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의 활용이 점점 증가하면서 IDC는 2020년에 각각 20% 안팎으로 기업의 도입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에 적합한 HP 제품이 있기는 하다. 리퍼브 혼합 현실 헤드셋과 Z 워크스테이션을 결합 모델이 있다. 하지만 이번 발표회의 준비 상황으로 짐작컨데, 이를 기업 환경에 도입해 일하도록 여건을 만들기 힘들 만큼 HP의 지원이 충분치 않아 보인 것은 아마도 착시가 아닐 듯하다. 어쩌면 이에 대한 해답은 올해가 아닌 1년 뒤에 있을 ‘업무의 미래’ 행사에서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